[아카이브] 이슬아 작가님
Dec 6, 2023 | Jun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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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과 기사와 인터뷰등을 기록해둔다.
한겨레,2021-02-03, 이슬아 “부모에게 배운 생계의 책임감…명랑하고 회복력 있는 글 쓰고 싶다”
92년생 작가 이슬아는 지금 같은 세대 독자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 작가 중 한명이다. 기존의 등단 방식 등 권위와 관행의 경로를 따라가는 대신 2018년 ‘일간 이슬아’라는 구독형 연재를 시작해 매일 0시 독자를 직접 찾아가는 산문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작가의 말대로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 학자금 대출 상환이라는 주어진 과제를 풀기 위한 해결책이었고, 그를 지금까지 ‘연재노동자’로 자리매김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일간 이슬아’의 첫 시즌 연재를 끝낸 뒤 그는 ‘헤엄출판사’ 대표라는 명함을 하나 더 추가했고, 이곳에서 나온 책 5종이 지금까지 10만부 가까이 팔렸다. 그 밖에도 라디오 디제이, 뮤지션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오며 올해에는 전방위 예술가로 좀 더 활동 영역을 넓히고자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고 있다. 지난 1일부터 ‘일간 이슬아’ 2021년 겨울호 연재를 재개한 이슬아 작가를 지난달 29일 서울 서교동 카페에서 만나 ‘책임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성인이 된 이후 늘 ‘투잡’이나 ‘쓰리잡’을 유지해왔다고 밝혔고, ‘일간 이슬아’ 시작과 함께 ‘연재노동자’로 활동하면서 라디오 디제이, 음악 활동까지 다양한 일을 해왔다. 현재 하는 일은 어떤 게 있나? “메인은 연재를 하는 집필 작가이고 두번째는 ‘헤엄출판사’의 대표 일이다. 세번째는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글쓰기 교사 일이다. 지금은 도시형 대안학교에서 중고등 청소년을 가르치고 직접 모집한 동네 초등학교 아이들도 가르친다. 집에서 가르치다가 코로나 확산 때문에 줌 수업을 하고 있다. <교육방송>(EBS) 라디오 ‘이스라디오’를 100회로 최근 마무리했다. 혼자, 그리고 동생 이찬희와 느슨한 팀으로 음악 작업도 비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새해의 변화 중 하나는 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에 들어간 거다. 이 역시 ‘느슨한’ 소속사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로서 하는 일은 모두 내가 꾸려나가고 영상, 화보, 음악 작업 등 다른 장르의 창작 활동을 할 때 든든하게 지원해주는 팀이 생겼다.” ―성인이 된 이후 늘 ‘투잡’이나 ‘쓰리잡’을 유지해왔다고 밝혔고, ‘일간 이슬아’ 시작과 함께 ‘연재노동자’로 활동하면서 라디오 디제이, 음악 활동까지 다양한 일을 해왔다. 현재 하는 일은 어떤 게 있나? “메인은 연재를 하는 집필 작가이고 두번째는 ‘헤엄출판사’의 대표 일이다. 세번째는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글쓰기 교사 일이다. 지금은 도시형 대안학교에서 중고등 청소년을 가르치고 직접 모집한 동네 초등학교 아이들도 가르친다. 집에서 가르치다가 코로나 확산 때문에 줌 수업을 하고 있다. <교육방송>(EBS) 라디오 ‘이스라디오’를 100회로 최근 마무리했다. 혼자, 그리고 동생 이찬희와 느슨한 팀으로 음악 작업도 비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새해의 변화 중 하나는 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에 들어간 거다. 이 역시 ‘느슨한’ 소속사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로서 하는 일은 모두 내가 꾸려나가고 영상, 화보, 음악 작업 등 다른 장르의 창작 활동을 할 때 든든하게 지원해주는 팀이 생겼다.”―2018년 ‘일간 이슬아’를 시작한 뒤 세번째 시즌을 진행 중이다. 시즌이 바뀌어갈수록 달라진 점은? “첫해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쉼 없이 연재를 하다 몸이 ‘아작’ 나는 걸 경험한 뒤 다음해 시즌부터는 연재 주기를 줄이고 많이 쉬는 것으로 페이스 조절을 했다. 내용에서는 첫 시즌이 이슬아라는 사람의 화려한 재롱잔치였다면 두번째 시즌에는 인터뷰 코너가 들어온 게 가장 큰 변화다. 나와 내 가족, 내 친구, 내 애인 등 반경 1㎞ 안에 있던 글의 주제가 좀 더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확장된 셈이다. 이때의 연재 글 중 단행본 <깨끗한 존경>으로 묶은 정혜윤 피디, 김한민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유진목 시인, 김원영 변호사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책으로 만난 스승들이라면 세번째 시즌에는 책에도 나오지 않고 에스엔에스(SNS)에도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27년간 이대목동병원 응급실에서 일해온 청소노동자 같은 분들이다. ―나와 주변에 대한 관심의 외연이 점차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묵묵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만 마이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잘 드러나지 않는 중장년층 노동자를 만나고 싶었다. 특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내가 직접 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코로나 유행 초기 때 대형병원 응급실들이 난리통이었는데 이 와중에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이곳을 계속 치우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이후 버섯 재배 농부나 인쇄소 노동자, 아파트 계단을 청소하는 나의 외할머니 등 오랫동안 한가지 일을 꾸준히 해온 분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1시즌 연재 때 세월호나 동물권, 공장식 축산 문제 등의 이야기를 하면 구독자가 많이 떨어져나간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조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면 떨어져나가는 독자들이 여전히 있긴 하다. 가볍고 재밌는 글을 읽고 싶은데 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느냐는 반응이다. 하지만 모든 글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지 않나. 독자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게 ‘일간 이슬아’를 하면서 내가 해온 연습이기도 하다. 다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친절하게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독자들과 ‘직거래’를 하다 보면 다양한 반응을 거르지 않고 듣는 게 장점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공격이나 비난을 대면해야 한다는 어려운 점도 있을 것 같다. “정말 다양한 반응이 메일로 오는데 내가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질문에만 답한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피드백도 걸러 들을 수 있는 힘 같은 게 생긴 거 같다. 전혀 상처받지 않거나 눈치 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젊은 여성 작가가 아니라면 듣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진짜 많이 들은 것 같다. 대중예술계에 있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이미지가 소비되는 건 당연하지만, 가능하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소개되고 활동하고 싶다. 납작하고 만만한 이미지로 소개되는 것을 거부해온 것 같다. 독자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감사해하거나 죄송해하지 않는 태도를 체화해왔다.” ―대학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일간 이슬아’를 시작해 1시즌부터 성공했다. 연재의 목적은 첫 시즌에 달성했고 작가 이슬아를 찾는 곳도 많아졌으니 매일 마감을 강제하는 연재 노동은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계속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가장 크다. 단순한 집필이 아니라 기획부터 홍보까지 내가 매체의 기획자이고 디자이너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수익률도 높고 내가 구축한 수익모델이라 계속 활용하는 측면도 크다. 청탁받아 쓰는 글은 불안정성이 있고, 초기에는 원치 않는 방향으로 수정되는 경험도 많이 했다. 내가 쓰고 싶은 방식으로 쓰고 싶은 만큼 쓸 수 있어 힘들더라도 계속해나가고 싶다.” ―직접 출판사까지 만들어서 책을 내는 이유도 같은가? “분명 수익률 측면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프리랜서로 7∼8년 살면서 디자인이나 사진, 영상 등 잔재주가 많아졌다. 조금만 더 힘쓰면 출판도 직접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겁 없이 달려들었던 거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일이 아주 많기도 했고 고되더라. 출판계에 작가와 출판사 말고도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있나, 왜 작가에게 인세가 10%밖에 안 돌아가는 구조인가 하는 수익 분배의 지형 같은 것도 알게 됐다. 지금은 내 출판사에서 직접 하는 작업과 다른 출판사와의 협업을 병행하고 있다. 타협 없이 만들고 싶은 책은 헤엄에서, 기성 출판사의 전문성에 도움을 받고 편집자와 상의하면서 만들고 싶은 책은 다른 출판사에서 하는 방식을 유지할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카페 알바부터 잡지사 막내 기자, 웹툰 작가, 누드모델, 글쓰기 강사 등 독립생활을 위해 쉼 없이 일을 해왔다. “열아홉살부터 독립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건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경기도 외곽의 부모님 집에서 4시간 통학을 하기 힘들었고, 문화예술계에 발 들일 기회도 서울이 많았고. 서울에 산다는 건 월세를 감당해야 하는 삶이라 쉬지 않고 벌었다. 그래도 좋았다. 무엇보다 내 공간을 가진다는 게 좋았다. 쥐가 나오고 물이 새는 반지하에 살아도 늘 깔끔하게 내 공간을 꾸렸다. 거기서 모든 힘이 시작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강단 있게 생계를 이어온 것 같다.” ―글에 부모님과 가족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엄마 이야기는 따로 책 한권을 묶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대기업 취직 등 보통의 부모들이 원하는 삶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는데 어떤 영향을 받았나. “어릴 때부터 뭘 하라, 하지 말아라 이런 게 전혀 없었다. 조건 없는 지지랄까, 아마 내가 작가로 성취를 못 했어도 부모님은 나를 지지해줄 거 같다. 이런 경우가 흔치는 않은 것 같다. 제일 큰 영향은 이분들이 블루칼라 노동자라는 점이다. 엄마는 식당, 마트 종업원 등을 하셨고 아버지도 공사 현장 노동이나 산업잠수사 같은 힘든 일을 계속 바꿔가며 하셨다. 생계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배웠다고 할까. 그리고 엄마, 아빠뿐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묻는 걸 좋아한다. 20세기 초에 태어난 이분들이 살아온 삶이나 직업, 사랑 이런 게 근현대사와 직접 만나는 부분이 많지 않나. 할머니들의 이야기만 따로 수집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젊은 층의 ‘비혼의 물결’에서 드물게 출산이나 육아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썼다. 이런 것들이 일부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다른 지향으로 오해를 받는 측면도 있는 듯하다. “나는 출산과 양육에 대한 욕구가 있지만 주변 친구들도 대부분 비혼·비출산주의고, 그들의 낳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이해가 간다.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고 살아가다 보면 좋든 싫든 각자의 여성주의적 시각이 자연스레 얻어지는 것 같다. 나 자신에게만 갇히지 않기 위한 공부가 페미니즘이기도 하고, 중요한 화두이지만 나는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을 포섭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다. 아카데믹한 공부를 하지 않은 우리 엄마나 아빠 같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설득하는. 또 페미니즘뿐 아니라 지구의 몇십년 뒤를 준비하는 환경과 동물권, 노동자와 장애인의 권리 등 확장성을 가지고 고민과 글쓰기의 지점을 넓혀가고 싶다.” ―어떤 식의 확장성인가? “장애인과 페미니즘, 동물권 이슈 등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을 착취하는 방식에서도 암컷 동물권 착취는 여성이 입는 피해와 비슷하고 공장식 축산은 가축들을 불구화, 장애화하는 작업이다. 멀쩡히 걸을 수 있는 소, 돼지, 닭의 팔다리를 못 쓰게 하고 어떤 장기는 고장나게 해서 신체를 불구화한다는 점에서 손상된 신체에 대한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장애인 문제와 페미니즘 역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작가는 스피커가 있는 사람이니까 타인의 목소리를 집중해 경청하고 전달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시사인, 2023-08-23 출판계의 강박적인 작업자 네 명이 모이면?
직육면체의 세부 사항에 집착하는 사람들
이슬아 작가와 이훤 작가의 첫 인연을 묘사한 글도 책에 나온다. 두 사람은 2020년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스승 중독’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배우는 걸 좋아하는 이슬아 작가가 시카고에 있는 이훤 작가에게 영어 강습을 부탁했다. “그 시기에는 외국어를 너무 배우고 싶었나 보다. 수능을 안 봤기 때문에 영어를 잘해야 할 이유도 없고 작가가 토익·토플을 할 이유도 없었다. 모국어를 좀 새롭게 느끼고 싶어서 배웠다. (이훤 작가의) 라디오 인터뷰를 듣는데 영어를 아름답게 구사하길래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외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슬아 작가는 화상 영어 수업 시세를 조사한 뒤 적절한 가격도 제안했다. 평소 작가의 책을 좋아하고 그의 행보를 응원하고 있던 이훤 작가로서도 낯선 경험이었다. “동료들이 서로의 작업을 좋아해서 잘 지낼 수는 있는데 영어를 가르쳐달라고는 하지 않는다. 처음 받아본 부탁이었다(웃음).” 그렇게 이슬아 작가는 ‘만져보지 않은 사람’과 난생처음 절친이 되었다. 두세 시간 이어진 대화에서 영어로 말한 건 한 시간 정도다. 17년간 외국에서 생활하고 이민자 정체성이 짙었던 이훤 작가에게도 일상적인 한국어 대화가 절실했다. 사고하는 한국어와 발화하는 한국어 사이에 갭이 있었다. 둘 사이를 잇는 다리가 부서져 있는 느낌이었다. “영어가 늘어가는 과정도 재미있었지만 한국어가 퇴화한 사람의 언어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한국어로 전시를 설명하는 자리는 좀 있었기 때문에 아카데믹한 한국어만 남더라. 섭섭하기도 했다. 아무리 친해져도 딱딱하고 예의 바르게 말하는 느낌이었다. 친한 사이에 할 수 있는 농담을 했는데도 ‘그렇게 말해준다니 정말 기쁘다’ 이런 식으로 답했다(이슬아).”
그 풍경이 ‘완벽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인생을 살 때도 내 안에서 길어 올린 뭔가를 세상에 던지고 나면 이후의 일은 내 손을 떠난다. 나를 떠난 이야기가 내 앞에 펼쳐지기도 하고 그것이 돌아오기도 한다. 우리가 끝내준다고 말하는 순간들을 대변하는 은유 같았다.” 일본어를 몰라 번역 앱에 의지해, 책에 들어갈 중요한 작업을 하고 싶은데 ‘들어와 줄 수 있느냐’고 세 소년에게 물어보았다. 그렇게 짧은 머리의 세 소년이 표지에 실렸다. 책 만드는 과정은 ‘너무 수월한 동시에 너무 치열’했다. 판형, 종이의 질감, 두께, 가격, 사진의 밝기, 간격, 위치, 조사 하나를 두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슬아 작가가 김 주간에게 ‘하나하나 관여해 피곤하냐’고 묻자 "정성과 예의를 갖추는 선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침범해야 한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훤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네 명(이훤, 이슬아, 김진형, 박연미 디자이너) 모두 자기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 대한 확신이 있는 강박적인 작업자들이다. 서로를 존중하지만 자신이 쌓아온 미감의 세계를 배반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넷이 만나 가장 멀리까지 갈 수 있는 데가 어딘지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편집자 말도 들어봐야 한다며 이슬아 작가가 말했다. “애초 이 직육면체(책)의 세부 사항에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직업의 사람들이라는 게 솔직히 너무 우스꽝스러운데 정말 진지하게 했다.”
친구들 역시 그의 산문에 자주 나온다. ‘친구들 연합’이 있다. 그 안에는 작가 친구들도 있다. “누군가를 글의 소재로 삼는 것이 예민한 시대지만 우리끼리는 우리 얘기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합의가 있다. ‘네가 어지간히 알아서 썼겠지’ 하는 마음이다. 그래도 조심스러운 부분은 허락을 받고 게재한다. 이 글이 나를 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드는 단계에서는 서로 마음껏 쓰라고 하는 것 같다.” 이슬아 작가는 ‘무해하다’는 표현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무해함이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널리 쓰이는 것이 시대의 징후이긴 하겠으나 ‘무해한 관계’가 어디 있나. 서로 이런저런 해를 입히지만 그럼에도 쌓아온 우정의 역사가 있고 기본적으로 애정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침범해도 괜찮은 것 같다.” 글에 직접 등장하는 이훤 작가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 장면을 이렇게 뽑아내네, 프로네... 생각했다(웃음). 글쓰기는 여러 소재를 이어가는 작업이라 창작자와 그 주변은 서로 침범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사랑도 우정도 가까운 애랑 하는 편’인 이슬아 작가도 팬데믹을 겪으며 변화가 있었다. 멀어도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번 책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만남인 것 같다. 어떻게 만나지 않고도 만날 것인가. 몸을 부딪히면서 만난다는 게 무엇인지 요가원과 태권도장을 소재로 하는 글에서 그 감각을 탐구하고 있다(이슬아).” 이훤 작가는 결국 ‘가까운 애’가 되었다. 지난해 한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17년 동안 불가능했던 일상과 만남이 여기서는 쉬웠다. 기분이 이상하다. 지금도 인터뷰지만 언어가 다르다는 생각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중 하나가 되기 수월한 환경’인데 미국에 살 때는 커피숍이나 식당같이 일상적인 장소에 가도 이 중 한 명이 아니라는 걸 자주 느꼈다.
이슬아 작가가 보기에 이훤 작가가 가진 소수자 감수성은 창작자로서의 강점이다. “그 사회에서 1등 시민은 아니었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어렵게 얻었지만 소중한 시선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으로 이주하면서는 이 나라에 있는 타국인들로 관점이 옮아가는 걸 느낀다.” 이훤 작가가 보기에 이슬아는 어떤 창작자일까? “다층적인 창작자다. 창작의 한 과정만 책임지려고 하지 않고 기획하는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임하는 사람이다. 여러 장르의 예술을 하는데 그때마다 함께하는 사람들을 (작업 안에) 열심히 초대하고 같이 이루어가는 공기를 만든다. 이런 게 늘 멋있다.” 협업자로서 이슬아 작가는 아름다움도 고집하지만 멈출 때를 결정하는 사람이다.글에서도 느껴지는 것처럼 이슬아 작가는 낙천적인 편이다. 이런 기질이 오랫동안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삶에는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한 건강함이나 명랑함이 창피할 때가 있다. 특히 친구들이 쓴, 나와 다른 훌륭한 글을 볼 때 그렇다. 첨예하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사유가 있다.” 드라마를 쓰면서도 그렇다. 드라마는 세상과 어떻게 불화했는지가 중요한 장르인데 갈등을 매끈하게 봉합하려는 기질이 나올 때가 있다. 화합하려는 관성이 작가로서 장점이자 단점이다.이슬아 작가는 최근 예스24가 실시한 ‘올해의 젊은 작가’ 온라인 독자 투표에서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5만594표(9.4%)를 받았다. 인생에서 받은 상 중 가장 크고 독자가 뽑아주어 더 특별하다. 첫 책을 낸 지 5년, 동시대 독자와 작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영향력을 키워왔다. “가진 힘을 좋은 곳에 쓰고 싶은데 사실 되게 알량한 힘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내가 가진 지면에서 중요하되 덜 얘기된 사람들, 이슈들을 다루려고 노력하지만 보통 생활할 때는 소재만큼의 반경만 생각한다.”
경향, 2021.11.13 이슬아 “금기 깬 자유? 외려 루틴하게 살아요”
- 이 작가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관찰력이 뛰어난 것 같아요. 실제로 응급의학과 전문의이기도 한 남궁인 작가(38)와 주고받으며 쓴 서간집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에서 스스로를 ‘호모 큐리어스(호기심이 많은 사람)’라고 표현하기도 했지요.
“궁금한 게 많아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잘해요. 대화 내용도 잘 기억하고요. 저는 저만 말하고 있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아요. 청소년기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어디서 몇명이 있든 수줍음이 많은 이도 말할 수 있도록 고루 질문을 던져요. 그 능력으로 작가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웃음).”
그를 대중이 주목한 것은 2018년 ‘일간 이슬아’라는 구독형 연재를 시작하면서다. 출판사나 홈페이지 등 중간 플랫폼을 거치지 않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자정에 e메일을 통해 작가가 구독자에게 직접 한편의 에세이를 배달한다. 이전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파격이었다. 한달에 20편의 글, 구독료는 1편당 500원꼴인 1만원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무엇보다 내용이 흥미진진했다. 화자인 나(이슬아)와 웅이(아빠), 복희(엄마), 찬희(남동생), 하마(애인), 조부모 그리고 친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시트콤 같은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아니, 진지한 이야기조차 그는 익살스럽게 쓸 줄 안다.
- ‘일간 이슬아’를 시작하고 네 번째 시즌인 2021년 늦봄호까지 마무리했으니 4년간 연재를 이어왔어요. 글감을 찾는 게 쉽던가요.
“어렵죠(웃음). 그래서 평소 아이폰 메모장에 사람들과 나눈 대사나 단어를 수시로 기록해두는 습관이 있어요. 그걸 기초로 한 글쓰기가 많아요.”
- 꼭 마감시간인 자정에 맞춰 원고를 마무리해 보내지요. 마감 스트레스가 심할 텐데 왜 미리 안 써두나요.
“낮에는 낮에 할 일이 따로 많이 있어서예요. 출판사 업무도 해야 하고, 독자들의 의견에 답글도 써야 해요. 그런데 어쩌다 한가한 날이 생겨도 마감이 코앞에 있지 않으면 긴장감이 떨어져서인지 잘 안 써져요(웃음).”
- 독자들의 e메일에 일일이 답변을 해주나요.
“제가 꼭 대답해야 할 내용일 경우 써요. 그런데 저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 왜요.
“작가가 육체적으로도 빡센 직업인데, 독자들로부터 피드백이 많잖아요. 선플이 많지만 악플도 적잖아 마음이 강해야 해요. 무뎌지는 게 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새 마음으로>에 등장하는 어른들을 인터뷰한 후 눈물이 많아도 강할 수 있음을 알게 됐어요. 제가 젊은 여성 작가이다 보니 저에 대한 얼평, 몸평도 많아요. 처음에는 그렇게 소비된다는 자체가 불편했는데, 지금은 그럴 바에야 최대한 다양하게 소비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요. 노래도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싶고, 글도 착한 글만 쓰지 않으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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