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문장수집 : 가녀장의 시대
Dec 12, 2023 | Jun 21, 2024
| Ryoon.With.Wisdomtrees
좋은 책을 읽고는, 미루지 않고 바로 적도록연습하자.
이슬아에게 그러하듯 그 문장들은 또 누군가에게 전신을 타고 흘러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언어란 질서이자 권위이기 때문이다. 권위를 잘 믿는 이들은 쉽게 속는 자들이기도 하다. 웬만해선 속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속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세계를 송두리째로 이상하게 여기고 만다. 어린 슬아는 선택해야 했다. 속을까 말까.
9p, *자크 라캉의 말
“이것부터 박읍시다.” 낮잠 출판사의 간판이다. 슬아는 맘 편히 못질할 수 있는 집에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다. 현관 앞에 서서 위치를 정하고는 말한다. “여기에 박아주세요.“ 가녀장의 지령이다. 웅이가 망치를 들고 오더니 벽에 꽝꽝 못질을 한다. 슬아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그것을 지켜본다.
16p
그들의 딸 이슬아는 성실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실 그것은 루머 같은 소문에 가까웠지만, 소문은 사람을 꽤나 바꿔놓는 법이다. 이슬아는 과대평가받음으로써 강제로 조금씩 더 부지런해졌다. 어쨌거나 자정 무렵엔 뭔가를 완성하긴 한다. 시간이 흐르고 이슬아는 글을 쓴다. 자정이 다가올수록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쓴다. 그것은 이슬아가 쓰는 글이라기보다는 마감이 쓰는 글이다. …중략 ”당신들도 성공하고 싶어? 그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요가를 해.“
21p
집밖에서 바라보면 가녀장의 서재에는 밤늦도록 불이 켜져있다. 그곳에서 반복하는 노동이 세 사람 몫의 생활비가 된다. 웅이는 새삼 겸허해진다. 담배를 다 피우고선 조용히 서재 문을 노크한다.
웅이는 집안의 남자 어른이었으나 그다지 가부장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부부는 모든 것을 상의해서 결정했고 맞벌이로 일했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공동 가장으로서 여러 험한 일을 했따. 그러면서 자신들이 얾나나 강한지 배웠다. 웅이는 생계를 위해서라면 바다에도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복희 역시 생계를 위해서라면 쓰레기 산에도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슬아는 모두가 거쳐온 지난한 노동의 역사를 지켜보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란 노동을 감당하는 이들이었다. 어떤 어른들은 많이 일하는데도 조금 벌었다. 복희와 웅이처럼 말이다. 가세를 일으키고자 하는 열망이 슬아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39p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노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살림을 직접 해본 가장만이 그렇게 돈을 쓴다. 살림만으로 어떻게 하루가 다 가버리는지, 그 시간을 아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에 그는 정식으로 복희를 고용할 수 밖에 없었다. 복희는 음식을 만드는 데만은 천재다. 슬아는 복희의 재능을 사서 누린다. 복희는 가장 잘하는 일로 돈을 번다. …중략… 복희는 자신에게도 남편에게도 없는 기질을 딸이 가졌다고 느낀다. 딸에게는 주인의식이 있다. 손님처럼 살지않는다.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감당하기 위해 자기 몸을 엄격히 관리한다. 그건 시아버지의 훌륭한 점이기도 했다. 좋은 점만을 빼닮은 게 복희로선 신기하다. 인간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훌륭해지는기도 모르겠다고 복희는 생각한다.
웅이는 다시 청소를 하러 간다. 청소기와 대걸레가 새겨진 양팔을 흔들며 걷는다. 치울 거리는 날마다 생겨나기 마련이다. 웅이는 하루치 체력이 아침해와 함께 차오르는 것을 안다. 복권에 당첨되기 전까지 그의 노동도 계속될 것이다.
글쓰기에 관해 천재가 아닌 아이는 없었다. 동시에 계속해서 천재인 아이 역시 없었다. 꾸준히 쓰지 않는 이상 말이다. 반복하지 않으면 재능도 빚을 잃을 뿐. 즐기면서 계속 쓰라! 그는 아이들에게 탁월함과 성실함 그리고즐거움이라는 세 가지 가치를 주입식으로 교육하녀 수 많은 십대 작가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슬아는 강연장에 한 시간 반 전에 도착한다. 찾아오는 동선을 미리 살피고 혹시나 독자들이 헤내지 않도록 미리 안내판을 확인해둔다. 강연장의 빔프로젝터, 마이크, 스피커 체크를 마친 뒤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둔다. 일찍 온 독자들이 정적 속에서 강연을기다리다가 뻘쭘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독자들의 의자에도 미리 앉아보는 편이다. 혹시나 삐걱거리거나 불편한 의자가 있으면 모두 새것으로 교체해둔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본다.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졌을 경우 담당자에게 연락해 채워둔다. 강연장의 조명 또한 보기 좋게 조절항다. 형광등은 죄다 끄고 편안한 세상의 무드등을 밝힌다. 강연은 정보 전달 이상의 기능을 해야 한다. 각자의 일로 분주했을 독자들이 집에서 발 뻗고 쉬는 대신 작가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교통체증도 감내하며 찾아온 자리다. 이 시공간은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특별한 경험이어야 할 것이다. 슬아는 강연자로서의 자신을 반쯤은 공연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멋지게 입고 강연장에 간다. 아우라는 강연자의 필수 덕목이다. 지나치게 긴장한 강연자는 아우라를 뿜을 수 없다. 긴장감에 관해 슬아는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어릴 적 그는 발표만 시키면 울먹거리는 아이였다. 하지만 살다보면 좋으나 싫으나 여러 무대를 겪게 된다. 그런 무대 경험의 반복을 통해 긴장을 다루는 법을 점차 익혔다. 성인이 된 후에는 무대 위에서도 무대 아래에서와 비슷한 편안함을 유지하며 말하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그건 누드모델로 일했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어떤 무대든 알몸으로 서는 것 보다는 쉬우니 말이다. 좋아하는 옷을 입고선 하고 싶은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차분히 구분하며 강연을 진행한다.
그들이 던진 질문에 슬아는 아는 만큼 성심성의껏 대답한다. 필요할 경우 청중에게 되묻고 지혜를 나누기도 한다. 슬아는 그들이 잠재적인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다. 훗날 그들 중 일부는 정말로 동료 작가가 된다. 슬아 역시 좋아하는 작가의 강연을 열심히 들으러 다니는 청중 중 하나였다.
그는 꼭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과 안 하는게 좋은 일을 단번에 구분할 수 있다. 프리랜서로 8년을 지내가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존자 혼자서 푸념처럼 늘어놓던 과거가 삼대를 거쳐 슬아의 버전으로 되돌아왔다….중력… 존자는 이야기의 주인이 여럿임을 알게 되었다. 존자의 삶은 존자만의 이야기일 수 없었다.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책을 읽어주다가 훌쩍거리는 젊은 복희 옆에서 어린 슬아가 무럭무럭 조숙해졌다. 슬아는 어른도 약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배웠다. 이제와서 뭘 배우냐고 복희가 묻고, 배움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거라고 슬아가 대답한다. 무슨 일을 해도 괴로운 건 마찬가진데, 잘하고 싶은 일로 괴로우면 그나마 낫잖아. 무슨 일이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게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 사실 글쓰기도 그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선 어떤 이야기도 완성할 수가 없으니까. 철이는 불필요한 자랑도 안 하지만 불필요한 겸손도 안 떠는 편이다. 일단 자기 자신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해. 아무리 마은에 안 들어도 자기 자신이랑 헤어질 수는 없잖아. 욕조로 들어간다. 그러자 조용한 미란이가 된다. 순식간에 노곤해져서다. 몸이 이완되니 들숨도 날숨도 깊어진다. 상사처럼 대해. 엄격하게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일을 완성할 수가 없어. 자신을 너무 풀어주지 않는거지. 좋은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유능한 상사처럼 나를 대한다는 얘기야. 맘놓고 낙관하기에는 슬아는 책에 관해 너무 많은 세부사항을 알고 있다. 더 잘할 수 있었을 부분이 끊임없이 생각난다. 그는 한숨 쉬며 중얼거린다. 폴 발레리가 그랬어요.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대요. 단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 거 뿐이래요. 슬아는 결정하는 사람이다. 가장이자 대표로서 출판사 이름을 결정하고 직원들 월급을 결정하고 책 제목을 결정한다. 또한 책값을 결정한다. 자신이 팔 물건에 합리적인 가격을 매기는 것은 상인의 덕목이다. 대표의 실책으로 한데 모인 자들이다. 그들의 야근 수당과 추가 수당을 지급해야 해서 지출이 늘었지만 이천 부를 전부 새로 찍는 것보다는 손실이 적을 것이다. 인쇄소 사장님이 고개 숙여 사과한다. 슬아는 제본기 앞에서 일하는 중장년 직원들을 바라본다. 이 일을 매일 반복해온 노동자들이다. 반복해서 일해도 실수할 수 있다. 인쇄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걸 슬아와 복희는 알게 된다. …중략… 커다란 소음과 코를 찌르는 잉크 냄새 속에서 그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출판사를 직접 운영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는 인쇄소에 화내지 않고 손실액 보상을 합의한 뒤 새로운 인쇄 발주를 넣는다. 낮잠 출판사를 처음 차릴 때만 해도 슬아는 책 만드는 일이 딱히 두렵지 않았다. 잘 몰랐으니까. 몰라서 무턱대고 씩씩할 수 있었다. 지금의 슬아는 그렇지 않다. 글쓰기와 출판이라는 작업이 갈수록 어렵게 다가온다. 책을 만들어 몇천 부씩 인쇄하는 것이 중대한 결정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할아버지와 슬아의 운명은 궤를 달리한다. 할아버지는 양면테이프를 두려워하는 사장이 아니었다. 이제 슬아는 책이 양면테이프보다 열 배는 두려운 무엇임을 안다. 그 두려움을 알게 된 것에 안도한다. 책을 사랑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자들이 출판사를 운영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슬아는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두번째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슬아는 생각한다. 막상 저렇게 열심히 할 거면서 왜 안 오려고 한 거냐…… 그러다가 깨닫는다. 열심히 할 걸 알아서 안 오려고 한 거구나. 부담스러우니까. 누구든 아침부터 최선을 다하고싶지는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가뿐하게 수업을 따라가는 슬아로선 알 수 없는 버거움이었다. 복희는 후각이 발달한 독자다. 슬아가 무심히 건넨 책에서 복희는 문학의 향기를 맡아버린다. “티타네 할머니가 그러는데, 우리는 다들 몸 안에 성냥갑을 하나씩 품고 태어난대. 근데 혼자서는 성냥에 불을 댕길 수가 없대.” “기억나. 촛불이 결국 타인이라는 얘기였지?” “맞아.” “아무도 안 읽어준다고 생각하면 글쓸 수 있겠어?”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때때로 한끼의 식사는 한 편의 글만한 대접도 못 받는다. “나도 친절한 사람이 좋아. 하지만 친절은 덤 같은 거예요. 당연하게 요구할 수는 없어.” “선생님은 먼저 선에 날 생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먼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요.” “남자를 만날거면 너를 존경할 줄 아는 애를 만나” 그렇게 말해놓고 웅이는 생각에 잠긴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자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웅이가 알기로 여자를 존경할 줄 아는 남자는 잘 없다. 웅이 자신을 포함해서 그렇다. …중략… 슬아가 대꾸한다. “보통은 나보고 존경하라고 하던데. 남자를요.“ ”너는 누구든 잘 존경하잖아.“ 웅이는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표현한다. 실은 내가 너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이 수업은 우리가 같이 만드는 거야. 모두가 책임을 나눠가지는 만남이거든. 그러니까 손님 말고 주인처럼 앉아 있어줄 수 있어? 손님 같던 아이가 팔짱을 푼다. 주인이란 달콤하고도 피곤한 것. 하지만 손님으로만 지내는 자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세계가 글쓰기에는 있다. 슬아는 문득 복희가 없는 미래를 생각한다. 복희를 그리워하며 멈춰 있을 자신의 모습이 꼭 기억나듯 그려진다. 이미 겪어본 것처럼, 마지 오래전에 살아본 인생처럼 그 슬픔을 안다. 그는 지금 이 시절을 꽉 쥐고싶다. 그러나 현재는 언제나 손아귀에서 쓱 빠져나가버린다. “무엇이 아름다운 건지는 우리가 직접 정할 수 있어. 너는 너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명하게 될거야.” 슬아는 집으로 돌아가버린 어린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진다. 월화수목금토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다시 잘해보기 위해서라고. 다시 잘해볼 기회를 주려고 월요일이 어김없이 돌아노는 거라고. 그러느라 복희는 창틀을 닦고, 웅이는 바닥을 밀고, 슬아는 썼던 글을 고치고 또 새 글을 쓴다고. “좋은 작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자신과 만물을 관통하는 우주의 실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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