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11월의 노래와 글쓰기와 현재에 존재하기.

Nov 15, 2021 | Jun 2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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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oon.With.Wisdomtr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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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순간 부터 듣기 쉬운 노래가 좋아졌다. 20대에는 팡팡터지는 듯한 노래들을 좋아했는데. 짜릿하게 만들어주었던 피치가 높은 톡쏘는 멜로디나, 기계음이나, 벅차게 만들어줬던 쿵쾅대는 드럼들, 쫄깃하고 짱짱한 발음, 그 좋았던 것들이 이제는 때때로 내게 소음공해로, 불안으로, 짜증으로 다가올 때가 더 많다.
    어르신들이 쏘아붙이는 랩으로 점철된 노래나, 요란한 멜로디와 비트를 장착한 노래를 들을 때 "아이고~ 정신사납다~! 소리좀 줄여봐~"라고 종종 말씀하시던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정말 정신사납고, 시끄럽다. 나이를 들면 들수록 편하고 쉬운 노래가 좋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 느껴지는, 휘몰아치며 극에 달하며 고음을 내지르는 구간이 꼭 한번씩은 있는 노래를 듣는것이 아직 미치듯이 괴롭지는 않지만, 괴로울 때가 더 많다. 위기 절정이 없더라도 같은 발라드도 잔잔한 것이 좋다.
    2. 가사가 많지 않고 단순 하더라도, 가수의 목소리를 제외한 꾸며지는 배경음이 화려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풍부하고 깊은 노래가 좋다. 현학적이고 중의적이며 세련된 가사보다는 진실된 가사가 좋다.
    너무 많은 것을 꽉꽉채운 노래보다는 조금 덜어낸 노래가 좋다. 쉬이 들려서. 숨겨진 의미를 노력해서 해석해야 하는 가사보다는 흐르는 강물이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머리보다 마음에 먼저 와 닿는 가사가 좋다.
    샤이니의 셜록을 정말 좋아했는데 만약 내가 30대에 그 노래를 들었다면 그 노래의 진가를 제대로 탐닉할 수 있었을까 싶다. 아니 관심이 가지 않기에 존재를 몰랐을 수도 있다. 20대에 그 좋은 곡을 만나서 다행이다. 비슷한 이유로 아이돌 노래를 꽤나 좋아하던 나였는데 안 들은지 꽤 오래 됐다. 이제 그런 노래는 한접시만 먹어도 배부르다.
    예전에는 뷔페가서 피자도 먹고 파스타도 먹고 치킨도 먹고 갑자기 신메뉴도 먹고 디저트도 먹고 좀 쉬 다 또 먹고(?) 4접시를 먹어도 괜찮던 나인데, 이제는 두 접시만 먹어도 괜찮다를 넘어서 버거운 배부름을 느끼는 것 처럼. 비단 아이돌 노래가 아니어도, 댄스음악, 힙합 등등의 여러장르를 퉁으로 쳐서 '짜릿함(경쾌함, 무시무시함, 섹시함, 창조적임 etc..)'카테고리 하위에 넣는다면, 지금의 나는 다시 여기 바닷가의 레벨 정도의 경쾌함을 거슬리지 않게 소화 가능한 수준이다. 또 모르지... 5년뒤에는 달라질지도. 아무튼 현재는 그렇다.
    3-1.
    또 하나 바뀐 것이 있다면 내가 클래식을 좋아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좋아하게 됐다. 정확히는 클래식보다, 가사가 없이 멜로디로 이루어진 노래에 마음이 쉬이 편함을 느낀다. 다양한 악기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아직은 피아노가 주된 소리로 채워진 곡이 좋다.
    그 중에서도 재기발랄한 멜로디와 화려한 테크닉과 예상못한 변주등으로 공작새같은 자태를 뽐내는 곡 보다는, 잔잔한 음악이 좋고 요즘은 묵직한 음악이 좋다. 온화하고 묵직한 소리가 평화와 위안을 준다. 아무래도 지금 계절이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들 보다는 음 자체가 낮고 묵직하여 따뜻하고 느낌을 주는 소리들을 찾게 되는 가을, 겨울이어서 일수도 있지만.(어쩐지 길거리에 마이클 부블레의 노래가 자주 들려오더라...)
    3-2.
    어제는 우연히 전진희의 피아노로 이루어진 아주 사적인 음반을 알게 됐다. 어떻게 우연히 알게 됐는지 잘 기억이 안난다. 아주 우연히 [breathing]앨범을 알게 됐고 9월, 10월, 11월, 12월을 듣게 됐다. 듣는 내내, '어찌 이런 음악을... 어떻게 이런 소리를....' 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음악평론가가 적은 앨범소개를 읽고는 "아...!"하고 속으로 감복했다. 그래서 이런 소리를 표현할 수 있었구나, 자신안의 소리를 음악으로 해소했구나-하고.
    평론을 읽으며, 동시에 노래를 들으며 어떤 종류의 고통과 시련은 먼 미래의 시점에서 봤을 때 그 사람이 그 사람일 수 있게 하는 특유하고 고유하며 소중한 궤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에는 슬펐지만 지나고보니 아름다운.
    4.
    아무튼 전진희의 breating앨범에 있는 november를 들으며 글을 써내려가던 중, 왜 그의 소리는 내가 감정을 들여다 보게 만들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좀더 찾아봤다. 이 앨범에 대해.
    왜 그의 소리는 내안의 불분명한 것들을 써내려 갈 수 있게 도와줄까? 싶었는데 아래의 칼럼을 읽고 나서 깨닫게 됐다. 그게 가능하게 하는 곡이구나.
     
     
    일하는 자들은 자주 자신의 몸을 고무줄 다루듯 한다. 끊어지기 전까지는 계속 당겨보는 것이다. 줄이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지고 위태로움을 감지해도 ‘아직은 늘어나니까’ 더 당겨본다. 툭! 끊어지는 순간이 찾아오고 나서야 내 몸과 마음의 한계를 알게 되는 경험은 인생 1회차의 누구라도 겪어봤을 비극. 처음부터 알고 조절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한계라는 것이 직접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알기도 어렵거니와 정신적·육체적 불능의 상태를 증명해야만 휴식을 허락하는 노동환경에서는 자꾸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안타까운 점은 앞서 말한 비극을 경험하고도 거기서 얻는 결론이 오래가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체력은 물론 당면하는 문제의 종류도 달라지니, 때맞춰 스스로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그에 맞게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기예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싶다.
    능숙해지지 않는 자기 돌봄의 과업 앞에서 무력해져본 사람이라면 전진희가 올해 초 발표한 음반 《Breathing》에서 희망을 찾아보라고 하고 싶다. 갑자기 찾아온 불안장애로 모든 일을 중단한 채 지내야 했던 시절, 그는 방 안에 오래 머물며 아무런 목적 없이 건반을 눌렀다. 마치 살기 위해 숨을 쉬듯, 손이 가는 대로 연주한 것이다.
    <Breathing in April>을 시작으로 사운드 클라우드에 올린 이 독백 같은 음악들은 예상보다 큰 호응을 얻었고, 그렇게 2년여 동안 시리즈로 이어진 28곡 중 13곡을 골라 완성한 게 이 《Breathing》 앨범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태생적 배경이 음악적으로도 분명히 다른 지점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뮤지션이 곡을 쓸 때 반영하는 최소한의 의도- 사람들의 귀에 흔적을 남기겠다거나 특정한 심상을 표현하고 싶다는- 가 없다보니 이 음반에 담긴 곡들은 멜로디와 전개에 있어 뚜렷한 방향성을 드러내지 않는데, 덕분에 듣는 입장에선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기보단 충분한 여유를 갖고 내 호흡대로 음악을 느끼게 된다.
    드문드문 등장하는 노트와 긴 잔향 속에서 깊고 천천히 숨을 고르는 것,
    이보다 더 나를 정성스레 대하는 행위가 있을까.
    "드문드문 등장하는 노트와 긴 잔향 속에서 깊고 천천히 숨을 고르는 것, 이보다 더 나를 정성스레 대하는 행위가 있을까"
    맞다. 스스로의 영혼과 마음을 정성스레 들여다보게 해주느 느낌을 받았다. 또 정말로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으며 내 호흡대로 음악을 느끼게 된다. 아주 평화롭지만 깊다. 듣는 데에 수고로움이 안들고 숨쉬듯 편안한데, 동시에 깊다.
    그건 그렇고 정말이지 평론가들이란.... 나도 몰랐던 내가 느낀 감정을 이렇게 적확한 문장으로 표현하다니... 이래서 전문가 전문가 하나보다. 또 역시 동시에 느낀건 무엇이든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귀하다는 것.
    5.
    그래서 내가 내마음을 잘 돌보기 위해서라도 자주 글을 써내려 가야 한다. 적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연습해야 한다.
    글을 써내려 간다는 것은 자신의 무의식을 정화시키고 씻어내리는 행위이자 자신과 진실로 대화하는 행위이다. 의미 모를 불안도 써내려가면 덜 불안하다. 의미 모를 분노도 써내려가다보면 이유를 알게 된다. 포착되지 않고, 해소되지 않던 감정은 포착되는 순간 부터 해소된다.
    정확하게 명명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 드는 때에도 그냥 죽죽 그 감정을 낚아채 천천히 써서 풀어내려가면 완전히 해소되진 않더라도, 그 전보다 덜 괴롭다.
    또한 글을 쓰는 행위는 집중을 하며 현재를 사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november를 들으며,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글을 쓰는 나는 지금 행복하다. 거리두기로 인해 드문 드문 채워진 카페내의 좌석들, 각자의 것에 집중한 사람들, 그렇게 구성된 환경 안에서 위 3가지로 이루어진 행복한 고독안에 있는 지금. 혼자이지만 따뜻하고 행복하다. 6.
    현재에 존재할 때에 대해 조금더 얘기 해 보자면, 마음이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존재할 때 사람은 세상의 소음에 덜 휘둘리게 된다.
    휘둘린다는 수동적 표현을 능동적으로 해서 달리 쓰자면, 나 자신이 세상을 덜 신경쓰게 되다. 짧고 쉬운 자극적이면서 달콤한 행복을 덜 찾게 된다. 자극적이고 달콤한 행복이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쏠려있던 영혼이 자기 삶을 살아가게 한다.
    몰입할때의 사람은 과거, 미래 어디에도 없다. 언제나 그 순간에 머무른다. 그렇게 현재에 존재하는 상태인 인간은 혼자이지만 혼자로서 충만하며,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다. 그런 시공간 안에 있게 된다.
    몇 년 전 한 책에서 사람마다 시간은 다르게 흐를 수 있으며 시간은 보내는게 아니라 그 '시공간'속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내용을 읽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개념을 적용하여 설명하자면,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으로 만들어진 시공간의 세계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무대라는 공간에서 온전히 곡에 집중하며 연주할 때 현존한다. 수험생은 책상 앞에서 온전히 눈 앞의 문제에 집중하며 공부할 때 현존한다. 놀이공원의 아이들은 온전히 그 순간에 즐거움을 만끽하며 현존한다.
    7.
    시간을 하루로 한정 할 때, "오늘"을 좀더 잘 보낼 수 있게 하는 아주 기초적인 노하우가 있다면 아침을 잘 시작 하는 것이다. 아침을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따라 그 이후에 이어지는 하루의 수 많은 선택과 결과가 달라지니까.(왜 그러한지는 타이탄의 도구들과 아주작은 습관의 법칙이라는 책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아침을 잘 시작하려면... 당연히 전날밤 일찍 잠자리에들어야 한다. 8시간 정도 충분히 숙면해주면 좋다. 그 후 기상하여 이부자리를 정리하기를 시작으로, 아침일기쓰기 샤워하기 이 두 가지가 하루의 많은 것을 조금 더 수월하게 만들어 준다.
    이 두 가지는 아침에 몸과 마음을 각자 씻어주는 행위에 속하는데, 아침을 이렇게 시작하면 확실히 그 하루는 덜 뿌옇다. 숙면으로 지난밤의 걱정과 피로가 가신 후 맞이하는 아침엔 좀더 객관적인 상태로 어제를 가다듬을 수 있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끓여 옆에 두고 어제를 반추하며 오늘의 다짐을 써내려 간다. 사람마다 아침일기에 담는 내용은 다르겠지만 어떤 내용이든, 일기를 쓰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스스로에게 솔직한 글쓰기는 내 마음과 영혼을 들여다보는 나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아침일기는 이따금 그 자체가 명상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침일기를 다 쓰면, 책상을 치우고 샤워를 하러 간다. 샤워를 하며 아직 잠들었던 몸을 깨운다. 뜨거운 샤워 호스 아래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머리부터 척추를 따라 이어지는 따뜻한 물의 감각에 잠들어있던 세포들이 깨어나는 것만 같다. 동시에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노곤함과 졸음도 사라지는것을 느낀다.(물론 몸살기가 있거나 컨디션이 안좋은 날은 샤워를 해도 그런 각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여기에 사실 아침 운동하기, 1분 명상하기, 간단하게 아침먹기 등등도 포함시키면 좋지만 나는 위의 두 가지를 하는 것으로도 효과를 경험했다. 그렇게 잘 청소하고 관리해준 깨끗하고 명료한 몸과 마음으로 시작한 하루는 확실히 다르다.
    그렇게 아침을 보내고 맞이하는 하루가 예상보다 꽤나 좋으니까 위의 루틴을 지키기 위해 또는 더 추가하여 운동이라도 하려 하기위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싶어지고, 그러기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하게 된다. 실로 선순환이다.
    8.
    그런데 사실 저런 아침을 못 보낸지 꽤 됐다. 그런 아침이 습관화의 진입로를 지나 1차 커브를 돌고 두번 째 출발 파란불을 기다리며 신호대기중에 있을 때 쯤, 백신을 맞고 나서 부작용을 겪었다. 한달이 넘게, 아주 다양하게.
    몸살을 비롯하여 살면서 한번도 겪지 못했던 종류의 불편과 고통도 겪었다. '자리에서 앉았다가 일어나면 머리가 왜 어지러워?'라며 한번도 겪어본적이 없는 불편함에 대하여 악의 없는 질문을 했던 나는 이제 편두통과 빈혈을 겪는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알게 됐다.
    '안압이 너무 올라서 머리가 깨질것 같이 지끈지끈거려요-'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엄마 아빠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 뛰지 않고 걷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왜 자주 숨차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마스크쓰고 일하니 너무 갑갑하지 않아요? 9호선 급행 타고 출근할 때 마다 진짜 숨이 턱턱 막혀요'라며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말을 건내던 동료의 말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원하지 않던 고통과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그 부분에 관한 타인을 비추는 공감능력과 이해력이 높아졌으니 뭐... 아주 싫은 경험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고통을 또 다시 제발로 순순히 겪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지금은 몸이 많이 회복됐고 이번에는 두번 째 커브도 돌아봐야지. 직각 주차도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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